▲ 발행인 류종철

2018년 7월 23일, 아침은 유난히 더웠다. 이제는 하나의 일상이 되어 버릴까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살인적인 더위가 1주일 이상 지속되어 일상을 힘들게 할 때, 문뜩 스마트폰의 속보가 나의 나른함을 일순간에 깨운다. 아! 그는 그렇게 아픈 짐을 내려놓았다.

그는 나와 같은 시대의 삶이다. 일찍이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후 일생동안 암울한 시대를 비껴가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 애쓴 행동하는 지성의 표본이다. 내가 얄팍한 현실주의에 빠져 시대의 아픔을 애써 외면할 때에 그는 열악한 노동자득과 민중 속으로 직접 들어가 시대와 함께 호흡한 앞선 운동가였다.

그는 모두가 넘지 못할 높은 벽이라고 느끼는 절망의 벽 앞에서도 그를 잘 표현하는 상징어가 되어버린 촌철살인의 위트와 강철같은 의지로 민중을 리드하던 낭만의 혁명가였다. 부조리와 타협은 없으면서도 항상 긍정적으로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꿈을 이야기하며 상대를 설득하던 원칙주의자, 진정한 운동가였다. 상대가 아무리 높고 강력하여도 불의와의 어떤 타협도 없이 약자의 권익과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던 진정한 진보운동의 화신이었다.

우리는 의도되고 일관된 사회의 진보 죽이기의 환경 속에서, 진보를 바라보는 편협된 인식 속에서도 국민에게 사랑받던 정치인 노회찬을 기억한다. 진보는 빨갱이라는 이념적 편협성을 온 몸으로 받아낸 그의 아픔을 이제야 그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고 있다. 그들에게만 유난히 엄격했던 도덕적 잦대와 그들에게만 유난히 가난과 희생을 당연한 운명으로 강요하던 사회와 그에 암묵적로 동조한 대중들에게 그는 티끌 같은 흠결이 그리도 부끄러웠을까?

그는 이미 그 나름대로의 엄격한 기준과 원칙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이미 그로부터 비판과 견제를 당한 재벌, 언론, 정치계, 학계, 종교계를 망라한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은 언제나 가능하다. 적폐로 싸여있는 환경 속에서 그 부조리의 카르텔과 분연히 맞서던 그의 용기와 기백은, 심정적으로 그의 생각과 열정에 동의하면서도 감히 분연히 나서지 못하던 이들에게는 마음의 부채로 남고, 그 투쟁의 대상인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 거대한 암흑의 세력은 언제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협박을 하면서 그의 의지가 약화되고 꺾이도록 부단히 견제하고 노력하였을 것은 자명하다. 그들의 천박한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영민한 그는 자기와 주변의 몸가짐에 늘 결벽증 환자처럼 행동하면서 무결점의 삶을 강요하는 엄청난 압박에 그의 심신은 극도의 피로감에 그를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간 것이다.

감히 누가 그에게 더 이상의 청렴과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가? 그의 죽음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지는 우리를 발견한다. 그 보다 몇 백배 부정한 자들의 뻔뻔함보다는 그들의 범죄에 대한 도덕 불감증과, 이런 엄청난 희생과 메시지도 곧 잊혀지는 집단 망각증이 우리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한다.

그는 죽음으로써 이 사회에 많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의 유언처럼 서로 짬짬이로 얽혀 있는 불공정의 사회에서 그가 지향하는 진보의 정치를 응원하자. 그가 사랑했던 정치적 목표에 비록 전적인 동의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열정과 고뇌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귀를 열고 가슴을 열자. 그가 타협 없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진보정치의 뿌리를 여기서 고사하게 할 수는 없다. 진정한 보수와 진보는 비행기의 양 날개처럼 균형의 아름다움과 효과로 더 멀리 더 빠르게 날 수 있지 않은가? 따뜻한 보수와 합리적인 진보는 서로 동전의 양 잎처럼 가깝고도 통하는 사이가 아닌가? 진정한 보수의 뿌리가 건강한 진보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상생의 정치를 그는 숙제로 던지고 홀연히 날아갔다. 이제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남은 자,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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