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출신 판소리 명인들...중고제를 꽃피웠다

▲ 이애리 전수조교의 충남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발전해오면서 판소리는 풍부한 사설과 고도의 음악성, 세련된 예술성을 가진 문화유산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판소리가 어떻게 발생되었을까?

최초의 판소리 이론서라 할 수 있는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최초의 명창으로 최선달과 하한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최선달은 결성(홍성군) 사람, 하한담은 목천(천안시) 사람으로 판소리 발생기 최초의 명창은 물론 20세기 전반까지 충청지역에는 30여 명의 명창들이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활약했다. 이들은 서산·홍성·서천·공주·논산 등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며 인기를 누렸는데, 염계달·고수관·방만춘·정춘풍·한성준·김정근·김창룡·이동백·심정순·황호통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불렀던 충청도 판소리인 중고제를 중심으로 점차 판소리의 유파가 발생하고 동편제, 서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고북의 고수관, 해미의 방만춘, 서산 학돌재에서 태어난 심정순 모두 서산출신으로 서산에 기반을 두고 활동했던 명창이라는 점에서 중고제의 맥이 서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기사는 박성환 전 국립창극단 부수석의 『중고제 판소리 명창 방만춘, 방진관 연구』를 기초로 하룻밤을 토론하며 작성되었다. - 편집자 주

 

▲ 박성환 전 국립창극단 부수석

 

서산출신 중고제 판소리 명인들

고수관, 방만춘, 심정순 명창

 

충남 서해안 지역 내륙안쪽으로 바다가 굽이쳐 들어와 큰 포구처럼 형성된 지역인 서산의 해미와 고북은 예부터 물산도 풍부하고 경제가 발달해 일찍이 문화가 꽃피었다.

해미의 고수관은 판소리 초기 8명창의 대표적인 인물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활동했으며 말년에는 공주에 거주했다고 한다. 학식과 음악이 뛰어났던 고수관은 변주가 뛰어나 소리판의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가사와 곡조를 기지 넘치게 지어 불렀다. 대구감사의 부임연에 초청받아 간 '고수관'이 기생들의 이름에 멋진 시를 붙여 춘향가에 나오는 '기생점고' 대목을 생생하게 바꿔 부르자 좌중의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고 한다.

고수관의 춘향가를 듣고 1826년에 신위가 쓴 관극시에는 멋지게 춘향가를 부르던 그의 모습과 정경이 그려지고 있다. 관극시에서 고수관은 '고수관, 염계달, 모흥갑' 등 판소리 초기에 유명했던 대표적 명창들과 함께 '고송염모'로 표현돼 있어 유명세를 짐작케 한다.

해미의 명창으로 또 한 사람 초기 8명창에 꼽히는 이가 바로 방만춘이다. 수련을 하는 동안 산에 있는 큰 소나무를 붙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지르다가 어느날 그 큰 소나무가 뿌리채 뽑힐 정도로 소리가 호방하고 우렁찼다고 한다.

또 서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고제 판소리와 음악의 종가가 있는데 바로 청송심씨 심정순 가문이다. 심정순은 타고난 음악가로 판소리, 가야금등 민속악 뿐 아니라 궁정악에도 조예가 있어서 이왕직아악부의 악장 역할도 수행한 바 있다. 그의 아들 심재덕도 판소리와 음률에 능했고 심재덕의 사촌 심상건은 가야금과 병창에 능했는데 특히 심상건의 제자였던 정남희의 증언을 들어보면 한번도 같은 가락을 다시 연주 하지 않는듯이 즉흥성과 변주가 능란해서 제자가 많지 않았고 누구도 그 실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한다.

심정순의 딸 심화영은 18세부터 큰오빠 심재덕에게 영산회상, 흥보가 등을 배웠고 양금과 판소리, 승무를 익혔다. 2000년 충남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후학을 가르치다가 2009년 11월 17일에 서산에서 타계했다. 지금은 그의 손녀이자 전수조교였던 이애리와 판소리제자 이은우 등이 보존회를 만들어 춤과 소리를 이어가기위해 애쓰고 있다.

 

▲ 박성환 전 국립창극단 부수석이 중고제와 일락사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고제의 토양은 내포문화

승무, 내포제 시조, 내포 앉은굿...서산의 무형문화재들

 

서산의 무형문화재에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인 서산박첨지놀이를 제외하고 제17-2호 내포제 시조, 제27호 승무, 제49호 내포 앉은굿 등 모두 가야산 불교문화의 토양속에서 탄생됐다.

최근에 발간된 상산삼매<象山三昧> 번역서에 따르면 사찰에서 공연되던 연희는 중고제 판소리의 공연장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상산삼매<象山三昧>는 1753년 내포 장천에 살던 선비 예헌(例軒) 이철환(李嚞煥, 1722~1779)이 가야산을 네 차례 유람하며 사찰에서 공연되던 스님들의 연희를 기록했다.

상산삼매<象山三昧>에서 이철환은 1753년 10월부터 1754년 1월 29일까지 네 차례나 가야산을 들려 정수암의 승려 여견과 일락사의 희잠, 여옥이라는 사미승의 공연을 구경하고 가야산 여행기 상산삼매<象山三昧>(1754년 작, 33세 때)를 남겼다.

박성환 전 국립창극단 부수석은 “육지와 바다의 집산지 서산은 조선시대 조창(漕倉)이 있어 천수만을 거쳐 서울로 왕래하는 물류 중심지역이었으므로 경제활동이 활발했고, 물류의 이동과 함께 명창들도 서울로 진출, 왕래하며 인근의 내포제 문화 속에서 고유의 중고제 판소리가 싹트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1900년대에는 일제 통감부 정치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지만, 판소리 명창들에게 어전명창이라는 영예를 안겨준 조선 왕조 및 국가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해 주는 강력한 후원층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이 시기를 전성시대로 꼽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실제 1900년대에 명예직 벼슬을 제수받고 어전명창으로 활동하였던 판소리 명창에는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심정순, 그리고 고수였던 한성준까지 상당수에 달했다.

이와 함께 박 부수석은 “당시 서울의 왕실과 귀족 사대부, 양반 상류층의 기호와 내포지역의 시조를 비롯한 양반 가창문화가 중고제 형성의 기반이 되었으며, 방만춘의 손자인 방진관의 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가곡풍 소리제는 양반 취향의 중고제 진면목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일락사 산신재 10주년 기념 ‘현음(玄音) 소릿길을 찾아서’ 길놀이

 

중고제 쇠퇴의 원인은 일제강점기 후원층의 붕괴

중고제 판소리의 부활은 판소리 원류를 찾는 길

 

방만춘을 위시하여 손자 방진관을 비롯한 옛 소리조를 고수하던 중고제의 쇠퇴의 원인은 일제강점이 시작되는 1910년대를 전후하여 명창들의 예술성을 인정해주던 기존 후원층의 붕괴에 있다.

전통사회의 해체, 즉 판소리를 고도의 예술로 육성하고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제공하던 양반사대부 계층 및 조선 왕실이 붕괴됨으로써 그들에 의해 형성되었던 고급스런 비평문화는 더 이상 판소리 명창들에게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대중공연을 통해 일반 대중의 소리 취향에 영합하는 통속성을 추구하게 되어 소릿조를 변화시키고, 남도잡가라는 음악갈래를 그들 내부의 비난 속에서도 공연종목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결국 판소리는 대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현실 적응력을 키웠고, 유파인 동·서편제 판소리는 중고제 소리관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대중 취향의 소릿조를 구사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고, 반면 중고제 판소리는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러나 통속성은 갈수록 설움조로 계면화되고, 유파나 바디를 떠나 하나같이 소리의 깊이와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판소리 미학의 실종은 우려될만 하다.

중고제 명창들의 소리제에 대한 학술적 연구와 함께 실기인들의 활발한 복원 작업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한 복원을 넘어 대동소이하기만한 현대 판소리의 음악관을 더 폭넓게 하고 장차 새로운 현재적 전통을 창조하고 수립하는 데 내적 근거와 잔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기에 중고제 판소리의 부활은 매우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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