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미딸기와인 선권수 대표

 

“포기는 배추를 셀 때만 붙이는 단어가 아니었다”

딸기와 와인의 만남! 그는 여전히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인터뷰 들어가기 전>

 

“아침에 일어나 와인 맛을 깨달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재미 난 속담이 있다. 이처럼 와인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최고의 선물이다. 또한 프랑스 부모들은 특별한 날 자녀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아이들이 태어난 그 해 와인을 담근다. 그들에게 와인은 분명 미러클이다.

해미읍성딸기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선권수(60, 과학딸기농장) 대표는 “누구는 ‘와인은 지금까지 인간이 궁리해낸 것 중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지만 제게 와인은 비극에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라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귀농해서 딸기농사를 지었는데 첫 작품치고는 아주 훌륭하게 잘 지었다”며 너털웃음을 짓는 선 대표. “그런데 문제는 판로가 없더군요. 있다 해도 가격이 안 맞아요. 하루 종일 가락시장에 올려도 인건비는커녕 그대로 싣고 내려오는 날도 있었죠. 힘이 쭉 빠지더군요. 생물로 팔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그길로 와인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녔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 미국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습니다.”

지방도를 타고 가다 유난히 황토색 내음이 코를 간지럽힐 때 쯤, 서해의 찰진 딸기 맛을 보았다. 달큰한 단맛이 혀끝에 닿으면 지친 몸과 마음이 순간 살포시 녹아내릴 것만 같은 맛. 지금부터 우리는 선권수 대표의 딸기 이야기를 들어볼까 한다.

 

연봉 1억 원! 당시 선권수 대표는 건설회사에서도 아주 잘 나가는 샐러리맨이었다. 하지만 거친 세상의 그곳과 정서적으로 맞지 않았던 그를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건설회사는 정년이 일반 직장보다 빨랐다. 정년이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은 ‘하루빨리 귀농하는 게 좋겠다. 정년이후 시작하면 일단 농업은 어렵다. 적어도 나이 50에는 귀농을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선 대표는 인생 이모작을 위해 과감히 30년 동안 다녔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서산시 해미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건설회사 근무 당시, 홍성 남장주공아파트 공사 감독을 하면서 해미면을 알게 되었다는 선 대표. “유난히 흙이 좋아 ‘언젠가 귀농을 하면 이쪽에 터를 잡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곤 했지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부모님과 할머니를 좀 더 편안하고 넓은 곳으로 모셔 건강하게 남은 여생을 보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사실 저희 집은 5대가 함께 서울 아파트에서 복작복작 살았어요. 식구가 너무 많았죠.

집사람에게 말했더니 난리가 났어요. 더구나 시골로 가서 산다고 하니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하는 수 없이 부모님과 할머니만 모시고 귀농을 했습니다(웃음).”

 

▲ 선권수 대표가 개발한 딸기와인과 함께

 

해미로 내려와 3천 평의 땅에 딸기농사를 지었다는 선권수 대표. “한미 FAT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딸기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딸기는 외국에서 수입을 못해오잖아요. 솔직히 우리나라 딸기 맛은 워낙 훌륭해요.”

 

사실 귀농하기 전부터 딸기농사를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준비를 철저히 해나갔던 그는 2010년 꿈에 그리던 딸기 농장을 지었고, 그해 딸기농사는 생각보다 훨씬 더 풍작을 이루었다. 하지만 부푼 꿈도 잠시, 형편없는 가격에 판로 또한 원활하지 못했다. 펀드와 적금, 보험, 주식 등 돈 되는 것은 남김없이 해약해 근근이 농장을 끌어가길 몇 해, 쨍하고 해 뜰 날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을 알고 다른 길로 눈을 돌렸다. 그것이 바로 와인이었다.

“꼬박 밤을 새워가며 와인 만들기에 집중했어요. 만든 와인은 지인들에게 시식을 시켜나가며 말이죠.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포기는 배추를 셀 때만 붙이는 단어가 아니었던가요?(웃음). 제가 주저앉으면 저만 바라보는 식구들은 어떡해요.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하게 해나가다 보니 드디어 세상에 내놓을 만한 맛이 탄생되었죠.

‘이제 됐어!’ 쾌재를 부르는 순간 법적인 요건이 저의 발목을 붙잡더군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꼬박 5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절박한 상황일수록 더 물고 늘어졌다는 선권수 대표. “딸기를 포기하는 순간 저의 집안도 포기하는 것이었어요. 그만큼 제게는 사력을 다한 싸움이었습니다.”

 

드디어 법적인 절차가 해결되는 날 온 식구는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 다 끝났어. 걱정하지 마” 큰소리 떵떵치는 그에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문제는 대중적이지 못한 와인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류는 인터넷 판매가 금지되어 있어 전통주들이 특히 애를 먹었다. 많은 돈을 쏟아 부은 그의 와인 공장은 하루가 다르게 힘 빠지는 애물단지로 변해가고 있었고, 급기야는 식구들에게조차 무능한 가장으로 비춰지게 될까 마지막 자존심을 다해 버티고 있던 찰나였다. 추락하는 것에는 분명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 ‘생물인 딸기를 시장에 내다 파는 건 한계가 있다’며 블로그에 혼자만의 일기를 써 나가던 어느 날, 느닷없는 메일 한 장이 날아들었다.

“선생님 딸기 농장을 촬영하고 싶습니다.” 몇 번이고 눈을 닦고 쳐다봤다는 선 대표. 그의 고함소리에 아내는 하늘이 무너진 줄 알고 안방에서 뛰어나왔고, 자초지종을 들은 아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은 바로 그럴 때 쓰이나 봐요. 방송을 한번 타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쇄도하더라고요. 행운의 여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죠.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그동안 막혔던 전통주가 드디어 인터넷 판매를 하게 되었지 뭐예요. 참으로 신기하대요. 아침에 일어나 마우스 한번으로 주문 현황을 본다는 것.”

그는 당시의 일상들이 눈에 보이는 듯 얼굴까지 붉혀가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기자도 덩달아 박수를 치며 선 대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 딸기와인 제조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선권수 대표

 

“대한민국 사람들은 떫은맛의 와인을 싫어해요. 달콤한 와인을 선호하죠. 혹시 우리 기자님도 그런가요?”라는 말에 기자는 와인 예찬론을 장황히 늘어놓았다.

 

“그럼요. 저도 지난 여름, 대표님이 만드신 ‘세인트 와인’을 직거래 장터에서 구매하여 밤마다 한 잔씩 홀짝거렸습니다. 달콤한 와인을 좋아하는 터라 기분이 일단 좋구요. 무엇보다 잠이 잘 와요.” 필자의 와인 사랑에 엄지손가락을 척 들며 크게 기뻐하는 선권수 대표.

“현재까지 약 30회 가량 공영방송을 탔습니다. 저도 어지간한 스타라면 스타죠?(웃음). 하긴 저보다 요 녀석들이 스타네요”라며 앞에 놓인 와인 병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으로 먹고 사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고 한숨짓는 선권수 대표.

“제대로 된 와인을 만들려면 한 병 만드는데 적어도 1년씩 걸려요. 그러니 대량생산이 답인 건 확실합니다. 그러려면 시설비가 어마어마해요.”

 

“딸기와 와인의 만남은 생각만으로도 황홀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딱 여기까지입니다. 여전히 갈 길이 멀어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출에 힘을 쏟는 선 대표.

 

그에게 벤처대학 민승규 박사님을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우리나라는 아직 와인 시장이 넓지를 못해요. 고민하던 찰나 박사님 덕분에 미국 시장으로 와인 수출길이 열리게 되었어요. 그것이 2017년, 햇수로는 벌써 3년째네요. 물론 아직은 걸음마 단계입니다. 하지만 만약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2020년부터는 약 100톤가량이 수출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곧 호주에서도 좋은 소식이 날아들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사드문제 때문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중국과도 조만간 다시 얘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와 미주 국가와도 수출을 추진하기 위한 사업기획단을 만들었어요. 그러다보니 시급한 것이 바로 공장 확장입니다. 기자님도 아시다시피 시골에 무슨 돈이 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펀드조성입니다. 먼저 투자자를 모아 저의 아이템을 공유할 계획이에요. 그러기위해선 다각적인 방법으로 시장조사를 진행해야겠지요.” 갈수록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갔고 인터뷰 내내 창밖에서 들어 온 밝은 햇살은 그의 앞길을 예고하는 냥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딛고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선권수 대표. 그는 농장으로 연간 5만 명 정도의 체험객들이 방문하는데 탐방객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을 선물하기 위해 한서대학교에서 드론을 배우고 있다. “농촌에서도 뭔가 혁신적인 것들이 도입되어야 하잖아요.”

 

▲ ‘대한민국 신지식인’ 명패 앞에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모든 열정을 바쳤던 그가 지금의 모습으로 우뚝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개발이었다.

 

그는 여전히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리농산물은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이 좋은 것들을 자국 농민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면 승산이 없어요. 무엇보다 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데 말예요. 제 아무리 품질 좋은 농산물도 사람이 있어야 소비가 될 것 아닙니까. 돌파구는 수출뿐입니다. 수출로 국내 딸기가 대량으로 빠져나가야 국내 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돼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희는 물론 국내에서 생산하는 농가들도 그 혜택을 보죠. 이게 바로 다다익선 아니겠어요? 개인적인 피해자가 있으면 안되잖아요.”

힘 있게 말하는 그에게 기자는 따뜻한 위로와 더불어 또 힘차게 걸어 나갈 이유를 찾았다. 진정한 삶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찾는, 길고 더딘 걸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가 함께 이들 곁에서 조금만 힘을 실어준다면 선구자적 생각을 가진 이들은 반드시 해낼 것이라 확신한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모든 농민들이 분명 힘을 얻을 것임도 기자는 안다. 부디 대한민국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분들에게 ‘지치지 말고 당당히 나아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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