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웅 편집국장

문재인 대통령의 탈(脫)원전 선언과 뒤이은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의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결정으로 빚어진 논란은 결국 공론화위원회의 공사 재개 권고로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거의 모든 언론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이 ‘숙의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의 성공적인 첫 실험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문 대통령 또한 공론화 방법을 두고 ‘새로운 갈등 해결 모델’ ‘역사적 첫걸음’ 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민참여단에 대해서는 ‘471인의 현자(賢者)’ ‘작은 대한민국’이란 평가를 내렸다. 생소한 숙의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한순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만트라(mantra·진언)로 등장한 것이다.

서산시도 서산시자원회수시설에 대한 주민갈등을 종지부 짓기 위해 공론화위원회를 추진, 진행중에 있다. 이는 민선7기 공약사항이기도 하다.

숙의(熟議)의 사전적 의미는 ‘깊이 생각하여 넉넉히 의논(議論)함’이다. 숙의민주주의란 그러한 숙의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형식이다.

하지만 숙의민주주의가 그리 간단한 걸까. 숙의를 활용하더라도 민주적이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숙의민주주의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대표성과 정당성이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선출된 시의회가 이미 존재하는 마당에 새로운 시민 대표를 뽑아 숙의하려면 이들이 모집단인 시민 전체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이 심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공론화가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민주주의 발상지인 고대 아테네가 그랬다. 페인트를 묻힌 줄을 피해 아크로폴리스에 나온 시민은 결국에는 민주정치를 중우정치로 타락시켰다. 또 비제도화된 참여의 폭발로 많은 혼란을 경험한 프랑스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만 그 주권은 국민의 대표를 통해서만 행사된다고 헌법에 못 박은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현실정치에서 숙의가 필요하다면 정당한 절차에 의해 선출된 시민의 대표인 시의회에서 하는 게 먼저라는 일각의 주장도 귀 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공론화위원회의 책임성이다. 나중에 결과가 안 좋으면 공론화위원회에 참가한 시민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공론화위원회는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거나 결정하기 까다로운 이슈 한 가운데에 서 있다. 쉽게 말해 어떤 결정이 나오더라도 찬반 양측중 한곳에서 욕먹을 만한 일이 대부분이다. 공론화위원회 토론회에 참여한 시민참여단에서 철저한 개인정보보호와 무기명, 비밀투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렇다면 시민이 선출하지도 않았고, 권한을 위임하지도 않고, 게다가 나중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시민참여단이 시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섣부른 공론화 결정은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샘플 여론조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공론화 방식’이란 것이 찬반 여론이 나뉘어서 행정기관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기가 난처할 때 시민의 뜻에 따르겠다는 식으로 전락하는 순간 숙의민주주의 장밋빛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진다. 얼핏 매우 민주적이고 탈권위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처럼 보이지만 행정의 책임회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행정은 주요 현안에 대해 공청회든, 설명회든 여론은 응당 수렴해야 한다. 숙의민주주의는 오랜 의회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영국에서도 완벽히 뿌리 내리진 못했다. 반론과 재반론, 제안과 설복이 교차되는 과정에서 상대의 의견이 맞을 수 있다는 겸허한 자세가 필수다.

공론화는 조사결과를 즉각 발표하는 여론조사와 달리 상호 토론회를 거친 뒤 여론을 다시 조사하는 방식이다. 숙의 기간 동안 사업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고, 찬성 측과 반대 측의 입장 역시 충분히 들은 뒤 최종 자신의 입장을 표하는 것이다. 즉, 공론화는 제대로 된 정보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여론조사의 단점을 극복하고, 토론과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공론화위원회를 질 높은 여론수렴의 한 과정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자원회수시설 공론화위원회는 충분한 가치가 있고 주민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소통의 중요한 도구가 된다. 다만 지자체장은 이를 바탕으로 소신껏 결정하고 집행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를 놓고 다음 선거에서 책임지면 된다. 그게 행정의 채를 잡은 사람들의 도리이며 책임행정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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