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들 “제삿날은커녕 시신도 찾지 못한 불효를 어찌하오리까”

【뉴스초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69주기 추모제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69주기 서산 합동추모제

 

서산 지역 2000여 희생되신 영령님들의 억울함을 해원하고 안식을 추모하는 ‘제3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합동추모제’가 14일 서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서산유족회(회장 정명호)는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 상의 1,025인을 비롯하여 2300여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다.

서산유족 회원들은 “69년이 흘렀습니다. 못나고 못난 후손들. 침묵과 굴종의 세월 넘어 이제야 세 번째 술 한 잔 올리나이다. 제삿날은커녕 시신도 찾지 못한 불효를 어찌하오리까”라며 흐르는 눈물을 가렸다.

정명호 서산유족회장은 추도사에서 “우리 유족은 수년 동안 정부와 국회에 계류중인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을 계속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요원하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과 당선된 이후에도 과거사 문제 해결을 강조하며, 이를 세 번째 국정과제에 포함시켰으나 입법기관인 국회는 여야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유족들의 아픔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목을 매었다.

정 회장은 “2018년 2월 5일부터 현재까지 국회 정문 앞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이어오고 있지만 아직도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음에 개탄한다”고 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족 회원과 함께 절대 포기하지 않고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갈 것”을 천명했다.

또한 정 회장은 추모공원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서산유족회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대전골령골, 메지골, 양대리, 교통호 등 30여 곳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어 무덤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2,000여 희생자가 영면할 수 있도록 ‘추모공원 조성’에 의견을 모았다”며 “이에 대해 성일종 의원과 맹정호 서산시장에게도 그 뜻을 전한 바 있다”고 전했다.

한편, 맹정호 서산시장은 추모사를 통해 “유족들의 아픔을 함께하며 2,000여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은 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답하고 “유족회에서 제기한 추모공원 조성에 대해 잊지 않고 있겠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100만

전쟁기의 한반도, 인권유린의 전시장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유족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서산에서만 2300여 희생자가 발생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그도 적군이 아닌 정부에서 자기의 국민을 이토록 처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 배경에는 1948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김구 선생과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의 한 여론조사를 보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계열을 지지하는 비율이 80%를 넘었고, 당시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에 성공한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이 재산과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파 청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1948년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1949년에는 친일파 청산기구인 반민특위를 공격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등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을 밝은 길로 인도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이런 와중에 1950년 한국전쟁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대 참극을 불러왔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자의적 판단에 따라 100만이 넘는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초토화 작전으로 학살을 감행했다.

학살 희생자에는 국민보도연맹원, 피난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 등 무고한 민간인을 포함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중에는 김구 선생 측 독립운동가 출신 등 다수의 민족주의자들도 포함됐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 출신 허경(1918년생) 선생이 그런 인물이다. 허경 선생은 백야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홍성군 갈산면 갈산보통학교를 1934년에 졸업하고 서울 경성실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37년 2월 일본 교토의 5년제 경도중학 재학중 독립운동의 이유로 퇴학당한 후 귀국, 전답 20마지기를 팔아 연변을 거쳐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의 행적은 조선총독부 대전지원 홍성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판결을 받은 국가 기록원 보관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허경 선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10일 서산경찰서 소속 사복형사 2명에 의해 연행된 후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아마도 1950년 7월 12일 인민군이 예산, 홍성에 입성한 사실로 비춰 군경 철수 시 대전형무소 이송 중 홍성 인근에서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서산태안 부역혐의자 30여 곳에서 집단 살해

메지골, 양대리 및 소탐산 일대 발굴도 필요

 

집단학살을 당한 이들은 인민군 점령기에 자의든 타의든 부역혐의자가 주 대상이었다. 이들을 선별하는 작업은 좌익에 의해 희생당한 유가족과 우익단체를 주축으로 구성된 치안대가 주 임무를 맡았다. 그러다보니 개인적 갈등 관계에 있던 마을 사람들조차 희생당하는 등 군경과 치안대의 임의적 판단과 사적 감정이 개입되기도 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최소 1,865명의 희생자들은 1950년 10월 초순에서부터 12월 말경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에서 집단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앞서 전쟁 발발 직후에는 국민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대전형무소로 유치되어 살해당한 서산지역 보도연맹원은 400여명 정도, 이 사실은 1950년 8월 12일 미 병참사령부가 미8군에 보낸 통신문에 적시되어 있다. 또한 일부는 대전형무소로 이송 도중 홍성군 광천읍 오서산 폐 금광굴에서의 집단학살과 채 이송하지 못한 채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양대리 및 소탐산 일대에서 자행된 직접 학살당한 자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유가족 중 한 분은 “당시 경찰의 손에 희생당하신 외할아버지는 당시 어머니와 이모 둘 딸만이 전부였던 집의 가장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17살, 이모는 11살쯤 시절에 아버지 시신을 찾느라 덜덜 떨면서 메지골을 헤맸다고 들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가 묻힌 곳에서 유골이나마 수습하는 것이 도리일진데 이에 대한 발굴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이념 전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추모제에서 유족들은 “이념이 무엇이기에 부모의 유골조차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불효자는 가슴을 치며 통곡으로 지난 세월을 살아 왔다”고 한탄했다.

 

유족들 “과거사 정리 기본법 즉각 개정” 주장

“서산시는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 조성해야”

 

▲ 이애리 씨의 진혼무

 

합동추모제에서 유족들은 “정부와 국회는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즉각 개정할 것”과 “서산시는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을 즉각 조성해달라”고 요구했다.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는 정부였다.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사회주의자의 가족이라는 낙인은 이들을 수십여년간 따라다녔다. 주로 희생자의 자녀였던 피해자들은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핍박 속에서 유년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들의 낙인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지워졌다. 1990년대 언론 등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면서 부터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한 전국조직인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전국 각지의 유족과 학계 등의 노력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5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이 제정됐다.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사실을 인정한 것도 이 시기다. 당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담화 형식으로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추모제를 마치며 유족들은 한 목소리로 “나이도 벌써 고령에 접어들었다. 과거사 정리와 추모공원 조성이 더 늦춰져서는 안된다. 조금이나마 한을 풀고 하늘에 계신 부모님을 뵐 수 있도록 서산시는 시급히 추모공원을 조성해 달라”고 애원했다.

한편, 이날 추모식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희생자 정명호 서산유족회장을 비롯해 맹정호 서산시장, 임재관 시의회 의장, 안원기, 유부곤, 이경화, 조동식, 최일용 시의원 및 조성복 서산경찰서장과 독립운동가 자손이며 유족회 고문인 허영일 노인회장 등 내외빈과 유족회원 200여명이 참석해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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