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와 함께 하는 인문학 산책-㉓

한광석 신부(해미국제성지)

어제 라디오에서 정답던 얘기 가슴에 가득하고로 시작되는 제비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문득 이제 봄인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봄을 상징하는 제비를 떠올리며 선과 악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던 시기에 흥부전은 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처마 밑에 지어진 제비집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똥을 많이 싸서 지저분해도 군말 없이 치우고 받침대를 대주는 것은 물론, 혹시 제비집에서 떨어진 새끼가 있으면 정성스레 다시 올려주었습니다. 나를 잘 기억해 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죠. 흥부처럼 제비에게 잘 보여서 큰 복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강남 갔던 그 제비들이 언젠가 우리 집에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 철썩 같이 믿고 기다렸지만, 어느 봄부터인가 그 믿음을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제비가 더 이상 이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현실의 제비와 같은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능, 이성, 창의력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행위에서 선()을 지향하는 의지가 인간다움의 기본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잘못된 행동으로 피해를 주는 다른 사람의 행위에 분노하는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궁극적인 목적으로 선을 추구할 때,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는 돈, 명예, 건강, 쾌락 등은 최고선(最高善)이 될 수 있을까를 질문해 봅니다. 돈을 추구하다 보면 명예를 손상하기 쉽고, 쾌락을 밝히다 보면 건강을 해치는 경우를 볼 때 이런 것들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최고선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최고선에 가장 부합되는 것은 행복입니다. 누구나 잘 사는 행복을 최고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데는 이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양사상을 기초를 제공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잇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입학하여 2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였습니다. 플라톤에게 배웠지만 점차 그를 비판하였고 아테네에서 학원을 설립하여 교육하였는데, 그의 강의를 정리한 아들 니코마코스의 이름을 딴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서양 최초의 윤리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선은 행복이며, 행복은 인간의 실천을 통해 얻어진다고 말합니다. 또한 행복은 마치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하루의 실천만으로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들지 못한다’(Una hirundo non facit ver)는 격언이 유래되었습니다. 행복은 꾸준히 윤리적인 선행을 실천할 때 얻어진다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2,400여년이 지난 오늘도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수많은 가르침, 명언, 강의와 처세술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진짜 행복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요? 아마 행복은 이런 것이라는 정의에 이끌려 일반화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이란 최고선은 이론이나 앎이 아니라, 반복적인 실천과 습관을 통해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수양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실현한다는 동양의 가르침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로운 일을 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절제 있는 일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며,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이런 습관적인 선행이 발전하는 인공지능과 챗GPT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자 특권일 것입니다.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들지 못하고 몇 번의 운동만으로 좋은 근육을 만들 수 없듯, 한두 번 선행의 실천으론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그 누구에게도 기적이 선물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