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와 함께 하는 인문학 산책-㉔

한광석 신부(해미국제성지)
한광석 신부(해미국제성지)

사람들이 한번쯤 가고 싶어 하는 하와이의 교포성당에서 사목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지개가 수시로 뜨는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산다는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현지인들을 만나면서 좀 더 다른 세상을 맛볼 기회도 있었죠. 거기 신부님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는데,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형제처럼 대해주는 분위기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첫모임 때 한참 어려 보이는 신부가 어깨를 툭 치면서 말을 걸어오는데,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버릇없이...”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왔습니다. 그 사건으로 제가 나이를 따져 서열을 매기는 유교와 군대문화에 깊이 물들어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의료 시스템이 우리만 못하지만 가족 주치의가 있어서 끝까지 도움을 주고 챙겨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눈을 맞추고 대화하면서 진심으로 환자를 대해주는 주치의를 만나면서 진료시간에 쫓겨 습관적으로 환자를 대할 수밖에 없는 우리와 비교가 되었죠. 수술이 취소되어 고통을 겪으며 기도를 청하는 문자를 받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의사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선사시대부터 병을 치료하는 행위가 있어왔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도 봉합 수술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의 벽화가 남아있습니다. 그럼에도 고대 사회에서 질병은 신이 내린 벌이거나 악마의 영향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인들도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치유력을 믿으며 신전에서 치료를 받곤 했습니다. 의사들은 이런 성전에서 의식을 진행하며 치료하는 역할을 담당했죠.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가 그런 주술적 요소를 배제하고 과학적 치료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의사가 지켜야할 의무로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고, 환자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며, 인종과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진료를 해야 한다는 점 등을 강조합니다. 또한 의사는 돌보아주고, 자연은 치유한다’(Medicus curat, natura sanat)는 당시 격언은 신체의 타고난 치유 능력을 존중하는 겸손한 의사의 역할을 말합니다. 생사문제를 신의 뜻이나 운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중세 유럽 의학은 독자적인 영역이기보다는 부수적인 업무로 취급되었습니다. 특히 외과치료는 이발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했죠. 피를 보는 일을 신성하지 않게 여겨 약초로 치료하는 내과만 의사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외과적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이발소를 찾았고, 이발사는 이발과 면도는 물론이고 상처치료까지 했던 것이죠. 이발소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동맥, 정맥, 붕대를 뜻하는 세 가지 색을 원통에 칠해 이발소 앞에 걸어 둔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16세기가 되면서 해부를 통해 인체를 들여다보고, 이어 발명된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관찰하고 병원균을 발견하면서 전염병 예방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학은 엑스선 촬영이 도입된 이후 CT, MRI와 같은 첨단장비가 계속 등장하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최고의 직업이자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사들이 거리에 나오게 된 것은 무엇인가 정책이 매끄럽지 않다는 얘기가 되겠죠. 그렇지만 2400여 년 전 히포크라테스가 선언한 의사의 최우선 역할은 환자의 생명과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살아가는 것이 의사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의사에 대한 존경과 권위는 환자를 먼저 챙기는 본연의 역할을 할 때 나옵니다. 그리스어로 권위는 전치사 엑스(ex, ~로부터)와 명사 우시아(ousia, 본질)란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곧 진정한 권위는 본질에 충실할 때 나오는 것이죠. 이게 어디 의사들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자기 자리에서 본질에 충실할 때 우리 사회에 권위와 존중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자신의 이익 앞에서 모든 권위가 무너져가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좋게 만드는데 기여하며 행복하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왜 사는지를 다시 질문하며 참된 우리 권위를 회복해 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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